목차
지난 글에서는 뮤지컬 일테노레(il Tenóre)의 작품 개요, 시놉시스, 등장인물, 캐스팅에 대해 소개했다.
(지난 글이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아래 링크 클릭)
이번 글에서는 지난 글에 이어 2018년 낭독회에 관한 얘기와 넘버, 연출 및 안무, 공연장(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총평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2018년 낭독회
넘버 얘기를 하자면 2018년에 있었던 낭독회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2018년 12월에 단 한번 진행했던, 전미도 배우, 최재림 배우, 이상이 배우가 참여한 최초 작품의 리딩이었다.
2018년에 있던 낭독회와 비교했을 때 이번 초연의 플롯은 상당 부분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작에서는 이선이 오페라를 막 시작하는 시점에 진연, 수한과 이미 오래된 친구 사이인 걸로 보인다. 진연이 이선에게 먼저 고백을 하며 '나는 그냥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생각 중이야. 그게 언제부터였냐면 (중략) 10살 때 네가 나 위해서 페달 밟아줄 때부터였는지..'라고 하는 대사가 있고, 초기작 1막에는 ' 02. 찬송가 : 평양 광성교회, 1921년', '03. 찬송가 / 그거면 돼 / 경성, 1930년 '의 넘버가 있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구사이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베커 여사에게 둘째 주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이선에게 수한이 '언제 들려줄 건데 너 노래하는 거?'라고 묻고, 이선은 '나도 아직 내 노래 못 들었어'라고 대답하는 부분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번 초연과 다르게 이들 사이에는 이미 오랜 세월 간 함께 했던 우정과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다.
주인공 세 사람의 관계성 외에 가장 큰 차이점은 초기작의 경우 이선의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과정을 좀 더 부각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형상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초기작에서는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면 말리지 않을 거야', '나도'라는 대화가 오고 가고, 이선은 밀라노로 성악 공부를, 진연은 상해 신간회에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다. '간절한 일'.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개인적 소명으로 꿈을 꾸는 이선과 시대적, 국가적 소명으로 꿈을 꾸는 진연의 대비 구도가 균형을 이루는 모습이다. 2막에서 23번 넘버에 이선은 '내 오직 유일한 잘못은 너무나 간절하다는 것, 간절히 더 간절히 원해'라고 노래한다. 그냥 꿈이 아니라, '너무나 간절한' 꿈이다.
너무나 간절한 이선을 보면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개인은 꿈을 꿔서는 안 되는가. 꿈을 꾸는 것마저 사치인 세상인가라는 물음이 마음속에 인다. 추측컨대 비극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꿈이 갖는 의미와 무게에 대한 주제는 이런 물음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아주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가족 같은 사람,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위험한 일을 하러 상해로 향하는데, 노래나 배우는 게 맞는 일일까 하는 내외적 갈등. 그리고 그 선택의 무게.
초기작으로 낭독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극 자체가 늘어지는 부분이 많고, 좀 쳐내야 하지 않을까 한다는 의견이 꽤 있었다. 아마 초기작의 주된 갈등 양상은 개인의 내적 갈등과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외적 위기에 국한되어 있고, 개인의 꿈에 대한 물음만을 던지고 있어서였을까? 초기작 전체를 보지 못해서 정확한 의견은 내기 어렵고 추측만 할 뿐이다.
사족을 조금 달자면, 낭독회 실황을 계속 듣다 보면 세 사람의 오랜 우정사이에서 나오는 어떤 바이브가 너무 좋아서, 이 설정이 없어진 것이 꽤나 아쉽다. 전미도 배우, 최재림 배우, 이상이 배우가 다시 한번 함께하는 날이 오길.
2018 낭독회 실황은 작곡가 윌 애런슨 개인 페이지와 작사가 박천휴 sound cloud에 일부 업로드 되어있다.
넘버
전체적으로 현의 부드러운 느낌을 많이 사용하는 윌 애런슨 작곡가답게, 이번에도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현악기를 주로 사용하고 클라리넷, 호른이 어우러진 넘버들을 선보였다. 가장 주가 되는 넘버는 극 중 오페라 곡 2개 'Aria 1 : 꿈의 무게'와 ' Aria 2 : 그리하여, 사랑이여'다. 언뜻 극 중에서 이미 있는 오페라 곡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미 있는 곡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곡들도 작곡가 윌 애런슨이 직접 작곡한 오페라 곡이다. 참고로 윌 애런슨은 하버드 음대를 졸업했고, 편곡 및 오페라를 공부했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부 넘버에서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2막 초반에 나오는 16번 넘버 '너라는 시간, 너라는 세상'이 그랬다. 이 넘버는 이 글 가장 초반에 링크해 둔 낭독회 메이킹 영상에 담긴 곡이다. 몇몇 곡 외에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곡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시험을 보러 갔다가 자꾸 모든 게 오페라로 보이는 상황에서 나오는 8번 넘버 '환상 오페라'나 '합시다 오페라~ 조선 최초 오페라~'라는 부분이 자꾸 귀에 맴도는 6번 넘버 '조선 최초 오페라 클럽'이 그랬다. 빨리 실황 음원이나 DVD가 나왔으면 좋겠다!
초연 1막
01. Prelude : 조선 최초 오페라 클럽 테마 / Aria 1 : 꿈의 무게 (Prologue Ver.)
02. 새로운 세상
03. Aria 1 (베커 여사의 수업 Ver.)
04. 더 크게
05. 오페라 레슨
06. 조선 최초 오페라 클럽
07. '꿈꾸는 자들' 번역본
08. 환상 오페라
09. '꿈꾸는 자들' 1막 1장 (소프라노 리허설 Ver.)
10. 됐는가, 그럴 각오
11. Aria 1 : 꿈의 무게 (골드레코드 오디션 Ver.)
12. 하고 싶은 말
13. Act 1 Finale : 단 한 번의 기회
초연 2막
14. Entr’acte / Aria 1 (LP Ver.)
15. Aria 2 : 그리하여, 사랑이여 (LP Ver.) / Aria 2 : 그리하여, 사랑이여 (Live Ver.)
16. 너라는 시간, 너라는 세상
17. 조선 최초 오페라 클럽 Rep.
18. ‘꿈꾸는 자들’ 1막 1장 (리허설 Ver.)
19. 마음이 정하는 일
20. 진연의 노래 : 어른의 세상에서
21. ‘꿈꾸는 자들’ 1막 1장 (부민관 심사 Ver.)
22. 작고 완벽한 세상
23. Showtime!
24. 잘못된 꿈
25. ‘꿈꾸는 자들’ 1막 1장 (부민관 공연 Ver.) / Aria 2 : 그리하여, 사랑이여 (부민관 공연 Ver.)
26. 진연의 편지 (a cappella)
27. Finale : 꿈의 무게
연출 및 안무
전반적으로 무대를 넓게 사용하고 구성이 다양하다. 암전이 거의 없이 무대전환을 하는 점이 좋았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과거로 돌아가 스토리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여러 사람들이 겹치듯 스쳐 지나가고, 주인공과 앙상블의 노래도 겹치는데, 문득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그런가 봐' 넘버가 떠올랐다.
(영상 첨부하다가 어디서 본 얼굴인 듯해서 자세히 보니 윤소호 배우다!)
자꾸 무대 연출 느낌이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 같은 연출가인지 찾아보니 아니었다. 영상도 다시 보다 보니 꽤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연출 디테일도 돋보였다. 1막 첫 장에서 이선과 진연의 방에는 함께 있는 사진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데, 2막에서 진연이 죽은 사실이 드러난 후에는 이선이 혼자 있는 사진으로 바뀐다. 진연이 이선에게 나비넥타이를 선물했을 때, '나 이거 죽는 날에도 매고 있을 거야.'라고 했는데, 정말 이선이 죽음 결심하고 무대에 섰을 때 그 넥타이를 매고 섰다.(흑흑)
안무도 다양한 시도가 많았는데, '환상오페라' 부분에서 의사들의 안무가 특히 재밌었다. 전체적으로 구성과 짜임에 공을 많이 들였고, 앙상블들의 합도 좋았다. (안무 합은 좋았는데,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여자 앙상블 중에 음이 떨어지는 분이 한분 계셔서 자꾸 귀에 거슬렸다.)
공연장(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뮤지컬 음향이 별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서 살짝 내려놓고 갔다. R석 1층 C구역 중간쯤 기준으로 주연 배우들 마이크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앙상블 마이크는 꽤 뭉개졌다. 그래도 살짝 귀에 거슬리는 정도였고, 아주 불편하지는 않았다.
단차는 1,2열은 단차가 없는 OP석이고 3열부터 단차가 생기는데, 단차가 꽤 높아서 전체적으로 시야방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총평
역시 믿고 보는 '윌휴' 콤비의 극이었다. 넘버가 계속 귀에 맴돈다. 1막의 전개는 꽤나 빠르게 흘러가고, 암전도 거의 없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몰입할 수 있다. 다만 2막에서 살짝 루즈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의 꿈에 대한 열망을 갑자기 시대적 사명이 압도하는 전개가 이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초기작에서 있었던 개인의 꿈과 시대적 사명 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항일 운동을 위해 준비하는 오페라에 이선의 개인적 꿈이 살짝 묻은 느낌이다. 그래서 결말에서 이선의 선택도 마치 당연한 듯이 그려진다.
하지만 정말 이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폭탄을 투척할 만큼 진연을 절절하게 사랑하거나 독립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게 느껴진다. 이선의 선택이 시대적 사명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풀어내자니, 낭독회에서 봤던 세사람의 오랜 우정과 사랑에 관한 설정이 없어진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극의 전개에 있어서 때로는 개연성의 생략이 가능하다지만, 갑작스러운 이선의 선택에 관객으로서 허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와 사랑을 모두 버리고 오페라라는 꿈을 선택한 후 후회하는 전개였어야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기작에서처럼 개인의 꿈과 시대적 사명이 대립하는 구도가 주어진다면,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일말의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와 국민이 고통받는 상황 속에서 개인의 꿈은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애초에 너무 어려운 주제긴 하다.
예술이 갖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고 사람들을 생각에 빠지게 한다. 만약 이 극이 개인의 꿈을 위한 끊임없는 고뇌와 그 무게로 인한 고통을 다루는 극으로 완성되었다면, 꽤나 어렵고 무거웠을 수도 있다. 많은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극이 되기 위해서 작가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초기작에서의 루즈함을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면 어떤 극이 완성했을까 하는, 아쉬움이라기보다는 그저 조금 많은 생각이 드는 결말이었다. 작가가 담고 싶었던 이야기 같은 오페라 속의 'Aria 1: 꿈의 무게' 가사를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된다.
"가네 멀어지네
빛바랜 희망이 되네
나의 오 나의 찬란하던 꿈이여
내겐 전부였네
무겁게 짓눌린대도
홀로 기꺼이 온전히 짊어졌던 꿈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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